시아자매 일상스토리

《아래층 시댁, 위층 며느리》 – 가까운 게 문제였을까, 멀어야 사랑이다 – 본문

디지털노마드(머니스토리)

《아래층 시댁, 위층 며느리》 – 가까운 게 문제였을까, 멀어야 사랑이다 –

siaGD 2025. 4. 19. 23:41

 

결혼한 지 8개월. 남편과의 신혼 생활은 평화로웠다.

 

따뜻한 아침, 조용한 저녁, 사소한 다툼은 있었지만 대체로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잘 지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는 생각보다 쉽게 깨졌다.

그날, 남편이 퇴근 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우리 부모님, 아랫집으로 이사 오셨어. 정확히는 9층!"

우리는 11층에 살고 있었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 가까운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때는 아직 몰랐다.

대표사진 삭제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이사 당일부터 예고도 없이 내 일상이 무너졌다. 시어머님은 입주 청소를 전문가에게 맡길 생각조차 없었다. "가족끼리 하면 되지 않겠니? 진짜 청소가 뭐라고 사람을 부르니."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무너졌다. 퇴근 후 겨우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걸레를 들고 욕실 타일을 문질렀다. 남편은 허리가 아프다며 거실에서 쉬고 있었고, 시아버님은 신문을 펼쳐놓고 조용히 앉아 계셨다. 누구도 내가 고생하는 걸 당연하지 않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어느새,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시어머님은 우리 집에 오셨다. 심지어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여셨다. "너 있었구나? 왜 안 나왔니?"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왜냐면...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시어머님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집에 있어도 편히 쉴 수 없었다.

마치 내 집이 아닌 것 같은 느낌, 그 불편함이 서서히 내 안을 갉아먹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간섭과 요구.

반찬을 가져다주며 “오이는 못 먹어도 가족은 안 가려~”라는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은 울고 있었다.

 

참다 참다, 나는 결심했다.

 

“어머니가 가족처럼 대하신다면, 나도 진짜 가족처럼 해드려야지.”

 

그렇게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카카오톡으로 불교 명언을 보내기 시작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세상도 고요해집니다.” “평온은 선택입니다. 아침밥부터 시작하세요.”

 

그리고 마침내 월드컵 예선전이 있던 날, 새벽 3시. 남편과 함께 치킨과 에너지음료를 들고 시댁에 방문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어머님은 졸린 얼굴로 문을 여셨다.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했다. "가족끼리는 다 함께 응원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 순간, 어머님의 표정에서 당황과 혼란, 피곤함이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걸 봤다. 내 가슴은 복잡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통쾌함과 죄책감, 그리고 서글픔까지. 나는 왜 이런 방식으로 나를 지켜야만 했을까.

 

그날 이후 어머님의 방문은 뚝 끊겼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에게 시어머님 자랑을 했고, 어느 날은 그들을 모두 데리고 시댁으로 갔다.

"우리 어머님 음식 솜씨가 정말 최고거든요! 꼭 드셔보셔야 해요."

식탁에 앉은 동료들이 연신 감탄했고, 어머님은 애써 미소를 지으셨지만, 손은 계속 바쁘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나는 미안함과 함께 복잡한 쾌감을 느꼈다. 이기적인 걸까? 하지만 그동안의 나도 너무 참았으니까.

 

결국 남편과 나는 주말 협정을 맺었다. 시댁과 친정은 각각 한 달에 한 번 방문, 방문 시 혼자 방에 들어가지 않기, 그리고 지금까지 시댁에만 갔던 8개월을 보상하듯 친정도 8번 더 가기.

 

처음으로 남편이 나의 입장을 인정해줬다. "이제야 좀 쉬는 것 같아." 그의 말에,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이제야 우리 집은 조용해졌다.

마음이 편안해졌고, 우리는 조금씩 웃을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부담이 되지 않도록, 서로의 거리를 지키기로 한 것이다.

 

가족이란 너무 가까이 있으면 숨이 막히고, 너무 멀면 마음이 식는다.

내게 필요한 건, 그 중간 어디쯤.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거리.

 

나는 이제야 진짜 '가족'이라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